
음성통역, 말 하나에 담긴 무게 — 수어통역사로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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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통역사로 살아온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현장에서 다양한 통역을 경험했지만,
그중에서도 여전히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통역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음성통역’, 즉 농인의 수어를 한국어로 말로 전달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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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를 말로 옮긴다는 것
많은 분들이 수어통역을 생각할 때,
‘말을 손으로 옮기는 것’을 먼저 떠올리십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방향도 있습니다.
농인이 수어로 표현한 내용을 청인(비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로 전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음성통역입니다.
단순히 손짓을 해석해서 말로 바꾸는 걸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언어의 구조를 바꾸고, 상황에 맞는 어휘를 선택해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재구성하는 고난이도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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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성통역이 가장 어려울까?
수어와 한국어는 완전히 다른 구조의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수어 “일 어디”라는 표현은
한국어로는 “어디에서 일하세요?”로 바뀌어야 하죠.
문장 구조, 높임법, 말투까지 바꾸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수어의 뜻을 한국어로 정확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단순한 언어 감각을 넘어 깊은 어휘력과 문맥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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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어를 얼마나 잘 아느냐가 관건입니다
음성통역을 잘하려면
단순히 수어에 능숙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국어 문법, 어휘, 높임말, 문체, 감정 어투, 말의 흐름까지도 세심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하죠.
그리고 그 지식은 책이나 사전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책을 읽고, 표현을 익히는 시간 속에서 다져지는 ‘언어 감각’**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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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하나에 농인의 이미지가 달라진다
음성통역을 할 때, 내가 선택한 단어는
단순히 그 농인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미지가 됩니다.
• 내가 정중하고 품격 있는 말을 사용하면, 농인은 지적이고 존중받는 존재로 보입니다.
• 반대로 내가 무심하고 낮은 수준의 표현을 사용하면, 그 사람의 생각마저 얕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지금 이 말을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이 말이 이분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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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음성통역은 통역 그 이상의 작업입니다
음성통역은 단순히 ‘말을 대신해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누군가의 생각, 감정, 정체성을 목소리로 옮기는 일입니다.
그 안에는 수어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한국어에 대한 깊은 지식과 감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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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음성통역은 그저 말을 대신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농인의 삶, 존엄, 표현의 깊이를 세상에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가 매끄럽게 이어지기 위해,
수어통역사들은 언어를 넘어서 문화, 감정, 인격까지도 통역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혹시 수어통역사를 마주하게 되신다면,
그 사람의 목소리 안에 담긴
보이지 않는 고심과 배려도 한 번쯤 헤아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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